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으려 할수록, 오히려 가장 가까운 관계가 먼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한때 그 함정에 정확히 빠진 적이 있습니다. 후배에게 잔소리 한마디 아꼈다가 클라이언트 앞에서 큰 사고가 터졌고, 그 뒤 우리 사이는 이상하게 더 서먹해졌습니다. 잘해줬던 시간들이 어색한 거리감으로 남아버린 경험, 혹시 비슷하게 겪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갈등회피가 관계를 망치는 이유
당신은 혹시 누군가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삼킨 적이 있으신가요? '괜히 분위기 이상해질까봐', '저 사람 상처받을까봐'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패턴을 갈등회피(Conflict Avoidance)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갈등회피란 불편한 감정이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과 욕구를 반복적으로 억누르는 행동 양식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게 단기적으로는 분위기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관계 자체를 곪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후배에게 보고 지연이나 자료 부실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던 몇 달 동안 저는 속으로 불만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터진 사고 앞에서 억울함부터 밀려왔고, 그 억울함은 고스란히 거리감이 됐습니다.
여러 임상심리 자료들은 갈등을 한 번도 겪지 않은 관계일수록 오히려 작은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소소하게 부딪히고 봉합하는 과정이 반복돼야 관계에도 일종의 탄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싸운 적 없는 부부가 오히려 더 빨리 멀어지는 사례가 종종 보고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 불편한 말을 아끼면 단기 평화, 장기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
- 갈등이 없는 관계는 문제를 수면 아래에 쌓아두는 것과 비슷하다
- 작은 마찰의 반복이 오히려 관계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
인지적 유연성이 낮아지면 생기는 일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갈등 앞에서 유독 더 흔들릴까요? 인지심리학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인지적 유연성(Cognitive Flexibility)의 차이에서 찾습니다. 인지적 유연성이란 상황이 바뀔 때 자신의 판단 기준과 행동 방식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능력으로, 쉽게 말해 '예외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연구진이 대학생과 성인 51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는, 어린 시절 학대나 방임, 가정 내 기능 장애 같은 부정적 경험(ACEs)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성인이 된 뒤 위스콘신 카드분류검사(WCST)로 측정한 인지적 유연성 점수가 낮게 나타나는 경향이 확인됐습니다. 출처: PLOS ONE — 아동기 부정적 경험(ACEs)과 인지적 유연성의 관계 연구. 전두엽은 스트레스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뇌 영역이라, 이 결과는 어린 시절의 스트레스 경험이 이후의 유연한 사고 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이 연구는 학대나 방임처럼 강도 높은 부정적 경험을 다룬 것이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조금 결이 다릅니다. 단순히 '칭찬을 많이 받아서' 문제가 생긴다기보다, 칭찬만 있고 교정이 없는 환경 자체가 스스로 대처 능력을 연습할 기회를 줄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를 대할 때 저도 무의식중에 늘 좋은 말만 건넸는데, 돌아보면 그건 배려가 아니라 제 불편함을 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후배도, 저도 예외 상황에 대처하는 연습을 함께 잃어버린 셈이었습니다.
조직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피드백이 오가지 않는 팀일수록, 작은 문제들이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한꺼번에 터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폭발은 단 한 번으로 조직 전체의 신뢰를 흔들어버리기도 합니다.
롤모델을 고르는 방식이 틀렸을 수 있습니다
혹시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라고 정해놓고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 사람의 실수를 보고 오히려 더 무너진 적이 있으신가요? 롤모델(Role Model) 설정은 성장에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방식이 틀리면 오히려 더 빠르게 포기하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긍정적 롤모델과 부정적 롤모델을 함께 활용하는 관찰 학습(Observational Learning)을 권장하는 편입니다. 관찰 학습이란 타인의 행동과 결과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행동 방식을 조정하는 학습 방식으로,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다뤄집니다.
실제 상담 현장에서는 긍정적 롤모델과 부정적 롤모델을 어느 정도 균형 있게 활용하라는 조언이 종종 언급됩니다. 특정 비율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좀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숫자로 나눠서 관찰한다는 발상이 실험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건 정확한 비율을 지키라는 얘기라기보다 '반면교사로 삼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제가 몇 번 시도해봤는데, 진짜 효과적이었던 순간은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감각이 몸으로 느껴질 때였습니다. 누군가의 성공을 머리로 배우는 것보다, 누군가의 실패를 가까이서 목격하는 편이 저에게는 훨씬 빠르게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 긍정적 롤모델: 따라하고 싶은 행동 방식과 태도를 골라서 흡수한다
- 부정적 롤모델: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를 각인시켜 행동의 하한선을 만든다
- 핵심은 어느 쪽이든 전폭적인 신뢰가 아니라 선별적 관찰일 수 있다는 점이다
고민의 횟수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심리학에서는 고민의 크기보다 고민의 횟수가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100점짜리 성찰 한 번보다 10점짜리 성찰 열 번이 더 깊은 사고 능력을 만든다는 견해입니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꽤 위안이 됐습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는 공식인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제 경험상 어떤 좌절은 열 번을 겪어도 여전히 아프고, 어떤 좌절은 딱 한 번으로 충분히 배우게 됩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균일하게 작동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견해가 본질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핵심이 '횟수' 자체가 아니라 '멈추지 않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좌절 내성(Frustration Toleran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좌절 내성이란 원하는 것을 즉시 얻지 못하거나 실패했을 때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심리적 역량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이 낮은 사람은 학원에서 문제가 안 풀리면 집으로 도망가고, 직장에서 피드백이 불편하면 관계를 끊어버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결국 타인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조건을 스스로 만들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성실하고 능력 있고 착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런 표적이 되는 역설이 여기서 생기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좌절을 혼자 겪느냐 함께 겪느냐인 것 같습니다. 친한 지인이 거래처에서 모멸적인 언행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서 가장 빨리 진정된 건 당사자였고 오히려 주변 친구들이 더 화를 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분노를 대신 받아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격감이 줄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외롭지 않은 상태에서 좌절을 겪는 것, 이게 적절한 좌절의 실제 조건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후배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건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불편함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선배로 남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욕심이 오히려 관계도, 조직도 망가뜨렸습니다. 지금도 그 패턴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불편한 말을 아끼는 순간마다 '이게 배려인가, 회피인가'를 한 번씩은 묻게 됐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 마음 때문에 정작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해야 할 말을 계속 삼키고 있다면, 한 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관계를 지키는 건 갈등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갈등을 함께 소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