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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인 줄 알았는데 보어아웃이었습니다 — 40대 직장인의 무기력 정체

by 가치생산자16 2026. 7. 20.

지난달 부서 회식 자리, 삼겹살이 지글거리는 불판 앞에서 입사 3년 차 후배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무심코 던진 말이 있었습니다. "과장님은 요즘도 이 일이 재밌으세요?" 그 순간엔 그냥 웃으며 넘겼는데, 이상하게 그 한 마디가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도 문득문득 떠올랐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남는 걸까 곱씹다 보니 지난 몇 년의 제 모습이 한꺼번에 겹쳐 보였습니다. 일은 분명 예전보다 잘하고 있는데, 뭔가 하나가 비어 있는 듯한 그 느낌. 40대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마주친다는 그 정체 모를 감각의 정체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번아웃인 줄 알았는데, 보어아웃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 상태를 번아웃(Burnout)이라고 막연히 짐작해 왔거든요. 번아웃은 감당하기 어려운 과부하가 누적되어 신체적·정신적으로 탈진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너무 많이 해서 지치는 쪽이죠. 그런데 제가 겪고 있던 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보어아웃(Boreout)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어아웃은 동일한 업무를 오랜 기간 반복한 결과, 뇌가 그 자극에 완전히 적응해 버려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뇌의 반응 자체가 무뎌지는 셈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상태는 겉으로는 번아웃과 비슷해 보여도 속은 꽤 다르다는 걸 알겠더군요. 지쳐서 못 하겠다는 게 아니라, 잘 해내고 있는데도 아무 감흥이 없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습니다.

문득 예전 부서장님이 떠올랐습니다. 퇴직을 몇 년 앞두고부터 유독 "이제 회사도 다 부질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분이었죠. 회의실 창가 자리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보며 그 말을 흘리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땐 그냥 지치셨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분이 겪고 계셨던 건 보어아웃에 더 가까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일하고, 잘하고, 이미 다 안다는 감각이 쌓일수록 뇌는 오히려 그 자극에 반응을 멈추고 무감각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성장감(Growth Perception)입니다. 성장감은 내가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주관적인 감각을 뜻하는데, 인지심리학 연구들은 인간이 이 성장감을 종종 '즐거움'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게임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도 게임 자체가 유쾌해서라기보다, 레벨이 계속 오르며 성장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시각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실제로 게임을 하는 동안 뇌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한 연구에서는, 승패에 따라 보상 회로가 단순한 쾌락 반응이라기보다 긴장과 억제에 가까운 신호를 보인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Frontiers in Human Neuroscience, Kätsyri et al., 2013).

그렇다면 40대 직장인에게 보어아웃이 찾아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릅니다. 20년 가까이 같은 분야를 파다 보면 웬만한 일은 이미 겪어봤고, 실수도 줄었고, 루틴도 몸에 밴 상태가 됩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전문가(Expert)를 "그 일을 잘해내면서도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잘한다는 것이 오히려 성장감의 상실을 의미할 수 있다는 역설이죠. 제 경험상 이 역설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게 내 탓인지 일 자체의 한계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 번아웃: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한 신체·정신적 탈진. "너무 많이 해서 못 하겠다"는 상태.
  • 보어아웃: 반복 루틴으로 뇌가 자극에 무뎌진 만성 무기력. "잘하는데 아무 감흥이 없다"는 상태.
  • 성장감 부재: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성장 신호가 줄어, 즐거움으로 착각하던 감각 자체가 옅어지는 현상.
요약: 40대의 슬럼프는 번아웃이 아닌 보어아웃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전문성이 높아질수록 성장감이 옅어지는 데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무 확장이 필요하다는 말, 반만 동의합니다

보어아웃에 대한 처방으로 "일에 작은 변화를 주어라", "직무 확장을 시도하라"는 조언을 접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그게 말처럼 쉬우면 다들 진작 했겠지'였습니다. 곱씹어볼수록 이 조언이 틀렸다기보다는, 절반쯤 설명이 생략된 채로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직무 확장(Job Crafting)은 자신의 역할 범위를 스스로 조금씩 넓혀가는 행동을 뜻합니다. 회사가 정해준 것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내 역할의 경계를 자발적으로 재설계하는 방식이죠. 제인 더튼(미시간대)과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당시 뉴욕대) 교수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직무 크래프팅을 실천하는 구성원일수록 직업 만족도와 몰입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관찰됩니다(출처: University of Michigan, Center for Positive Organizations). 이 부분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제 경험으로도 새로운 프로젝트의 주변부를 살짝 건드렸을 때, 오히려 기존 업무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경험을 몇 차례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걸리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뇌를 fMRI로 찍어보면 일할 때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하는 표현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표본을 대상으로 어떤 과제를 수행했을 때 나온 결과인지 구체적으로 짚어봐야 의미가 살아납니다. 뇌과학 연구는 실험 설계와 과제 유형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과를 "일은 원래 즐거울 수 없다"는 보편적 명제로 확대 해석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성격 5요인(Big Five Personality Traits) 가운데 우호성(Agreeableness)과 개방성(Openness)이 경제적 성취와 연관될 수 있다는 시각도 비슷한 맥락에서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격 5요인은 외향성, 성실성, 신경증성, 우호성, 개방성으로 인간의 성격 특질을 분류하는 심리학적 모델입니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크다"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서, 개방성이 부를 만드는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관관계(Correlation)와 인과관계(Causation)를 혼동하는 방식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 때 종종 활용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검증하기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체 흐름 자체가 틀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도 실제로 시도해봤는데, 기존 업무 옆에 살짝 다른 역할을 얹었을 때 확실히 뭔가 다시 살아나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다만 이걸 실행에 옮기려면 "조직이 그 여지를 허락해줘야 한다"는 전제가 함께 언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무 확장을 오로지 개인의 의지 문제로만 이야기하면, 구조적으로 여지가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조언에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직무 확장은 보어아웃 완화에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뇌과학이나 성격심리학을 근거로 든 일부 주장은 연구 출처와 인과관계를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그 후배의 질문에 지금의 저라면 뭐라고 답했을지 생각해봅니다. "재밌진 않은데, 의미는 있어"라고 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더 솔직한 답이고, 오래 일해 온 사람들 대부분의 실제 상태에 가까울 겁니다. 보어아웃은 실패의 신호라기보다 전문가로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신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이고, 작은 직무 확장을 통해 성장감의 회로를 다시 살려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지금 그 시도를 조금씩 해나가는 중입니다.

참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Yn8H7LokK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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