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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사람이 더 쉽게 번아웃에 빠지는 이유, 이분법적 사고

by 가치생산자16 2026. 8. 13.

열심히 사는 사람이 번아웃에 더 잘 걸린다는 말,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지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같은 팀 과장님이 회식 자리에서 "저는 아무것도 이뤄낸 게 없는 것 같아요"라고 했을 때,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분은 팀에서 가장 꼼꼼하고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고기능 우울증(High-Functioning Depress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기능하지만 속으로는 조금씩 소진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날 이후로 그 과장님 얼굴이 종종 떠올랐습니다. 물론 제가 심리 전문가는 아니니 그분을 진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저 제 눈에는 그런 패턴이 겹쳐 보였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잘하는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못 했다"고 말하는 이유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기력이 없고 일상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알려져 있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그 공식이 항상 맞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과장님은 매년 새해에 큰 목표를 세우고, 그걸 100% 채우지 못하면 그해 전체를 실패한 해로 규정해버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팀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는데도, 본인이 정한 목표 지점에 닿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성취 자체가 없었던 일처럼 취급된 거죠.

심리학에서는 이런 사고 패턴을 이분법적 사고(Dichotomous Thinking)라고 부릅니다. 결과를 완전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 이 둘로만 나누고 그 사이의 과정이나 부분적 성취는 아예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지 오류입니다. 인지행동치료(CBT) 분야에서 오랫동안 다뤄온 대표적인 인지왜곡 패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참고: APA Dictionary of Psychology).

글쓰기가 취미인 후배도 비슷했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조회수와 댓글 수가 기대에 못 미치면 "역시 재능이 없나 보다"며 몇 달씩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정작 그 댓글들 중에는 꽤 진심 어린 반응들이 있었는데, 숫자라는 덩어리 기준으로만 보다 보니 그 의미들이 전부 지워진 셈이었습니다.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완벽주의(Perfectionism)와 번아웃(Burnout)의 연결 고리입니다. 완벽주의는 단순히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 결과가 스스로 세운 기준에 못 미치면 그 자체를 실패로 처리해버리는 심리 기제에 가깝습니다. 이 패턴이 반복되면 뇌의 보상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도파민 분비가 줄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기 자체가 소진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개인의 의지력 문제가 아니라 만성적인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증후군으로 공식 분류하고 있습니다(참고: WHO).

제가 보기에 이 인지왜곡이 무서운 지점은, 객관적으로 성과가 좋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기준이 높을수록 도달하지 못한 영역도 넓어지고, 그만큼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낄 근거도 늘어나는 구조니까요. 겉에서 보면 대단해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공허한, 그 역설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루틴을 완벽하게 세우려다 오히려 더 무너지는 이유

루틴을 세우라는 조언은 워낙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보통 루틴이라고 하면 새벽 기상, 운동, 독서, 명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가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제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 방식으로는 이미 지쳐 있는 사람이 오래 버티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헬스장에서 알게 된 지인이 딱 그랬습니다. 주 6일, 매일 한 시간이라는 계획을 세워놓고, 하루라도 빠지면 "어차피 망친 거"라며 몇 주씩 아예 손을 놓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루틴이 지속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실패 기준이 돼버린 셈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왓더헬 효과(What-the-Hell Effect)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한 번 규칙을 어기면 "이미 글렀으니 그냥 다 포기하자"는 심리가 작동하는 겁니다. 한 번의 이탈이 전면 포기를 정당화해버리는 자기합리화 패턴인데, 기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지인도 정확히 이 패턴이었고, 본인도 알면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에는 루틴을 세 단계로 나누는 방식이 꽤 실용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시작 루틴(Starter Routine)은 책상에 앉는 것처럼 가장 작은 첫 행동 하나만 정해두는 겁니다. 동기가 없어도 몸을 움직여 일단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인 셈입니다. 유지 루틴(Maintenance Routine)은 회식 다음 날처럼 컨디션이 나쁜 날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한 축소 버전이고, 복구 루틴(Recovery Routine)은 루틴이 며칠 끊겼을 때 다시 진입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잠깐의 공백이 곧바로 왓더헬 효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 시작 루틴 — 동기 없이도 물리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최소 행동 하나 (예: 책상에 앉기, 운동화 신기)
  • 유지 루틴 — 컨디션이 나쁜 날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축소 버전 (예: 거실 한 바퀴 걷기)
  • 복구 루틴 — 며칠 끊긴 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다리 (예: 다음 월요일에 시작 루틴만 수행)

취미에 대해서도 비슷한 구분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아웃 상태에서 취미를 해도 아무 느낌이 없다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취미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지금 필요한 기능과 맞지 않는 취미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복(이완과 수동적 몰입), 통제(즉각적인 작은 성취), 성장(점진적인 실력 향상), 연결(관계를 통한 소속감) — 이 네 가지 기능으로 취미를 나눠보면 지금 자신에게 어떤 방향이 필요한지 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라면 성장 취미보다는 회복 취미가 먼저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길게 보는 게 쇼츠보다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봅니다. 쇼츠는 짧고 빠른 전환 때문에 오히려 인지 자원을 계속 소모시키는 쪽에 가깝거든요.

다만 이 방법론에 대해 저는 한 가지 의문도 갖고 있습니다.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번아웃이 심할 때는 무언가를 "선택해서 실천"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부담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잘 짜인 분류 체계가 정작 가장 지쳐 있는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해야 할 일 목록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거죠. 상담 쪽에서 일하는 지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쪼개는 기술을 배워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기준의 높이가 바뀌지 않으면, "쪼갠 것조차 제대로 못 하는 나"라는 새로운 자책거리가 생길 수 있다고요. 방법론을 적용하기 이전에, 왜 그렇게 높은 기준을 내면화하게 됐는지 그 맥락을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결국 남는 질문

그 과장님이 회식 자리에서 꺼낸 말이 왜 오래 기억에 남았냐 하면, 그게 그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해에 세운 목표를 절반쯤 이뤘을 때 "결국 또 못 했네"라고 정리해버린 적이 있습니다. 절반을 이뤘다는 사실은 셈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성취를 덩어리로 보는 습관은 그만큼 오래됐고, 고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꽤 필요한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라는 감각이 익숙하신 분이 있다면, 그 공허함이 게으름의 증거는 아닐 수 있습니다. 목표를 한 덩어리로만 보는 사고방식이 중간의 모든 성취를 지우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완벽한 루틴을 한 번에 세우려 하기보다, 오늘 딱 하나의 시작 루틴만 정해보는 것부터가 실질적인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글은 제 개인적인 경험과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으로, 전문적인 심리 상담이나 의학적 진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어려움이 오래 지속되거나 일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나 상담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눠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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