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저는 꽤 오랫동안 직장에서 대화를 잘 못한다는 걸 인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박 부장님께 보고를 드렸다가 "이것밖에 못 하겠어? 몇 년 차야?"라는 말을 들은 그날, 저는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자리로 돌아와 종일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저도 똑같이 후배에게 "이런 것도 몰라?"라는 말을 무심코 던졌더군요.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말이 딱 제 이야기였습니다.
뚜껑 효과, 왜 우리는 갑자기 나쁜 말을 하게 될까
일반적으로 대화 실패의 원인을 성격이나 말주변 부족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20년간 대화를 연구해 온 박재현 대화 트레이너의 설명을 접하고 나서, 제 생각이 꽤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뇌는 평온한 상태에서 두 가지 능력을 자연스럽게 발휘합니다. 상대의 감정을 읽는 공감 능력, 그리고 문제 상황에서 도움을 주려는 문제 해결 능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거나 불안해지거나 우울해지는 순간, 이 두 능력이 일시적으로 차단됩니다. 이것을 흔히 '뚜껑 효과'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뚜껑 효과란 감정이 격해질 때 전두엽의 이성적 판단 기능이 억제되고 무의식적 반응이 앞서는 심리 현상을 가리킵니다.
뚜껑이 열린 상태에서 사람들이 내뱉는 말은 대개 여섯 가지 언어 패턴으로 수렴됩니다.
- 판단: "이렇게밖에 못 하겠어?"
- 비난: "누구 닮아서 그러냐?"
- 강요: "좋은 말 할 때 똑바로 해라."
- 비교: "다른 팀 보면 이러냐?"
- 당연시: "몇 년 차야, 이건 기본 아니야?"
- 합리화: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
박부장님이 저에게 했던 말은 이 중에서 당연시와 판단이 동시에 들어간 발언이었습니다. 제가 경험상 느낀 건, 이 여섯 가지 패턴이 연속으로 쏟아질 때 상대방도 뚜껑이 열리면서 서로가 판단과 비난을 주고받는 갈등상태(conflict escalation, 갈등 고조)로 빠르게 진입한다는 것입니다. 갈등 고조란 대화가 이성적 해결 대신 감정적 승부 게임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언어 패턴이 관계를 바꾼다, 그런데 쓰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대화 기술로 자주 언급되는 방법 중 하나가 '나 전달법(I-message)'입니다. 나 전달법이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필요를 중심으로 말하는 화법입니다. "네 문제는 이거야" 대신 "나에게 중요한 건 이거야"로 표현을 바꾸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왜 이렇게 게으르냐"고 하지 않고 "아빠한테 중요한 건 우리 거실이 좀 깨끗한 거야. 네가 먹은 건 치워줬으면 해"라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법이 이론적으로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써봤는데, 솔직히 순간적으로 이걸 치환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뚜껑이 열린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기법이 '미러링 기법(mirroring technique)'입니다. 미러링 기법이란 상대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되돌려 줌으로써 발화자 스스로 자신의 말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상사가 "너 생각이 있어, 없어?"라고 했을 때, "팀장님, 제가 생각이 없다고 하신 게 맞나요?"라고 되묻는 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이 다시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가고, 발화자가 스스로 말을 수정하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도 이와 유사한 효과가 확인된 바 있습니다. 대화 중 감정을 조절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최소 15초에서 최대 15분이라는 점은, 갈등 상황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미루는 것만으로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권력 불균형 앞에서 대화 기술은 얼마나 통하는가
저는 이 부분에서 박재현 트레이너의 조언에 한 가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론적으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대화 기술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박 부장님이 "몇 년 차야?"라고 했을 때, 저는 미러링 기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없는 환경에서는 어떤 기술도 꺼내기 어렵습니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표현했을 때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말합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팀 내 심리적 안전감이 높을수록 구성원의 발언 빈도와 업무 성과가 함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Harvard Business Review).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개인의 대화 능력을 아무리 갈고닦아도 조직 구조와 리더십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박재현 트레이너의 이론이 다소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대화 기술 훈련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기술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권력 불균형이 완화된 환경이 먼저 갖춰져야 합니다. 개인에게만 대화의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이 있음에도, 제가 이 내용에서 가장 깊이 남은 사례는 따로 있습니다. 한 리더가 칭찬할 팀원이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던 장면입니다. 그분은 조직에서 브레인으로 불릴 만큼 유능했지만, 팀원을 사람이 아닌 기능 단위로 대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자녀를 칭찬해 본 기억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육 중에 억지로나마 딸에게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고, 그 딸이 4일 뒤 "나를 살린 우리 아빠에게"로 시작하는 긴 답장을 보내왔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감동 사례로 받아들이기엔 무게가 달랐습니다.
이것은 인지 재구성(cognitive reframing)의 힘이기도 합니다. 인지 재구성이란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도록 언어나 관점을 바꾸는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기법입니다. 그 아버지가 딸에게 보낸 메시지는 계산된 기술이 아니라, 잊고 있던 긍정적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의 해석 체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경험상, 말의 내용보다 말의 방향이 더 중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의 문제를 지적하는 방향이 아니라,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결과는 꽤 달라집니다.
대화는 기술이기 이전에 습관입니다. 박 부장님께 받은 상처를 후배에게 그대로 전달했던 저처럼, 나쁜 언어 패턴은 학습되고 반복됩니다. 반대로 좋은 패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완벽한 대화를 할 수 없더라도, 오늘 있었던 좋은 일 하나를 먼저 꺼내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대화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다 보면, 관계도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지금도 연습 중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EDtfehBzIs&list=TLPQMDIwNjIwMjYa_l3xcmJfBg&index=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