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이 "뭐 드실래요?" 하고 물어보실 때, 그게 배려의 절차라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부장님 드시고 싶은 걸로 메뉴가 정해지는 걸 보면서 속으로 '물어는 왜 했지?' 했는데, 그 삐딱한 생각이 사실 제가 한국인의 관계 심리를 하나도 이해 못 했다는 증거였는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 갈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고려대학교 허태균 교수의 연구를 통해 들여다봤습니다.
관계주의와 주체성 — 한국인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요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뭐 드실래요?" 하고 먼저 물어보는 것. 사회심리학자 허태균 교수는 이 작은 행동 하나를 관계주의(Relationalism)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관계주의란 내 취향보다 상대방의 선택을 먼저 확인하고, 그에 맞춰 내 선택을 조정할 준비가 돼 있는 심리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선호를 고정된 것으로 보는 개인주의와는 출발점 자체가 다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관계주의는 긍정과 부정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줄을 서다가 뒤에 있는 어르신께 "먼저 가세요" 하는 건 분명 배려입니다. 그런데 그 배려는 동시에 원칙을 흔드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회식 자리에서 느꼈던 그 묘한 기분도 사실 여기서 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칙이 깨지는 게 불편했던 게 아니라, 배려인지 형식인지 헷갈렸던 거였죠.
관계주의와 함께 등장하는 개념이 주체성(Agency)입니다. 여기서 주체성이란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인하고 확대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조직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미덕이지만, 한국의 관계주의에서는 일대일 관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굉장히 소중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쏠게"라는 말이 단순한 호의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행위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밥을 사겠다고 나서는 분들이 계신데, 저도 그 심리가 영 이해가 안 됐었는데 이제는 좀 납득이 됩니다.
흥미로운 건 이 주체성이 강한 사회에서 독특한 창의성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제품 개발자도 몰랐던 사용법을 찾아내고, 와플 기계로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원칙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유연하게 재해석하는 능력이 여기서 나옵니다. 저 역시 회사에서 매뉴얼에 없는 돌발 상황이 터졌을 때 팀원들이 오히려 즉흥적으로 대응책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이게 단순한 순발력이라기보다 이런 관계주의적 유연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기 상황에 유독 강한 조직력을 보이는 것도 이런 특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같은 특성이 부정적으로 작동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설계도에 열 개가 들어가야 하는데 "일곱 개면 되겠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의성이 아니라 부실 시공이 됩니다. 한국인의 관계주의와 주체성이라는 특성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관계주의: 상대의 선택에 맞춰 내 것을 조정할 준비가 된 상태 — 배려가 되기도, 원칙 위반이 되기도 함
- 주체성: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성향 — "내가 쏠게"가 그 전형적인 표현
- 유연성: 원칙을 고정값으로 보지 않는 성향 — 창의성의 원천이자 동시에 원칙 붕괴의 위험
설득 착각 — "나만 합리적이다"는 믿음이 혐오가 되기까지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누군가와 의견이 달랐을 때, "합의점을 찾아보자"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결국 네가 내 쪽으로 오게 될 거야"라고 생각해 본 적 없으신가요? 솔직히 저는 있습니다. 작년 겨울, 이사 문제로 아내와 다퉜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논리적으로 설명했다고 믿었는데 아내는 그게 강요처럼 느껴졌다고 나중에 말했습니다. 그 순간엔 억울했지만, 돌이켜 보면 제가 정보를 주면 상대가 당연히 내 결론에 동의할 거라는 전제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허태균 교수는 이 과정을 설득 착각(Persuasion Illusion)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설득 착각이란 "내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충분한 정보를 주면 상대도 반드시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착각을 말합니다. 이 착각이 작동하는 순서가 꽤 명확합니다. 먼저 정보를 줍니다. 그래도 상대가 안 바뀌면, "머리가 나쁜가 봐"로 넘어갑니다. 그다음엔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저건 인간도 아니야"가 됩니다. "~충"이라는 표현이 왜 그렇게 많이 생겨났는지, 이 흐름을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제 경험상 이건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늘 "내가 네 나이 때는"으로 시작하시고, 저는 그게 답답하면서도 정작 후배들한테 비슷한 말을 하고 있더군요. 자녀에게, 후배에게, 배우자에게 애정이 클수록 더 설득하려 든다는 말이 제 일상에 꽤 정확하게 겹쳤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관계주의와 주체성, 설득 착각이라는 심리적 틀로 한국 사회의 갈등을 설명하는 방식은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매끄럽게 들릴 때는 오히려 경계하게 됩니다. 세대 갈등, 젠더 갈등, 계층 갈등에는 심리적 성향 외에도 경제적 격차나 조직 구조, 제도적 불평등 같은 구조적 요인이 함께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사회통합 실태 진단 연구에서도 계층·세대·젠더·공공 영역의 갈등을 다루면서, 심리적 요인 못지않게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구조적 배경이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 함께 작용한다는 점을 짚고 있습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 심리학적 설명이 "아, 그런 거였구나" 하는 납득감을 주는 순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구조 문제가 뒤로 밀려날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허태균 교수는 "설득하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특히 자녀에게 "내가 네 나이 때는"이라는 말은 30년 전 기준으로 지금을 재단하는 것이라고 짚습니다. 대신 "요즘은 그렇게 놀아? 그게 재밌어?"처럼 판단 없이 물어보는 태도가 갈등을 줄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물어보는 척하면서 결국 평가로 끝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결국 이 모든 게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상대를 이해하려는 건지, 설득하려는 건지. 관계주의라는 심리적 성향이 배려로 작동할지, 원칙 붕괴나 갈등으로 번질지는 그 출발점에서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잘 못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회식에서 "뭐 드실래요?"가 배려의 절차였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고, 아내에게 논리를 들이밀던 그 대화가 왜 강요처럼 들렸는지는 이해하게 됐습니다.
주변에 유난히 설득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나 자신이 그렇다면, 한 번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건가"를 먼저 물어보시길 권합니다. 심리적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도 갈등의 온도는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